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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선', '카오 티 타오(Cao Thi Thao)'. 둘 다 그녀의 이름이다. 희선 씨는 한국으로 귀화한 베트남인이다. 고희선이라는 이름은 베트남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Cao'가 성인 '고'가 되었고 '착하다'라는 '타오'는 선.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희선 씨는 한국에 녹아들어 살고 있다.고희선(41) 씨는 창원시 팔용동에서 매일 베트남 쌀국숫집 문을 연다. 식당은 남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과 같은 건물에 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한국어는 유창했다.가방 두 개 들고, 남편 손잡고, 한국으로희선 씨는 베트남 동나이성 출신이다. 졸업 후 호찌민 인근에 있는 빈증성에서 남편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일을 했다."남편이 아주 착했어요. 남성적인 면도 있었고요. 일을 하다 뭐에 부딪히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큰소리부터 냈어요.(웃음) 근데 제 남편은 그렇지 않았어요. 실수를 한 원인을 먼저 찾고 차분하게 해결하는 그런 사람이에요."남편은 베트남에 파견 근무를 하러 온 기술자였다. 옷 만드는 일을 했는데 솜씨가 아주 좋았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2년 동안 연애했다. 그때 희선 씨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렇다고 남편이 베트남말을 잘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 언어는 문제가 아니었다. 곧 둘은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희선 씨."시부모님은 안 계셨고 시누는 환영한다며 결혼을 축하해주셨어요. 저희 집에서는 처음에 결혼을 반대했어요. 주변에 결혼해서 캐나다, 미국으로 간 사람은 좀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랑 결혼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그때 한국 사람 이미지가 별로 안 좋기도 했고요.(웃음) 그렇지만 허락받고 결혼을 했어요."그때가 2004년도였다. 결혼을 하고 단란하게 가정을 꾸릴 생각으로 들떠있던 부부에게 곧 큰 문제가 생겼다. 두 사람이 다니던 회사가 베트남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게 된 것이다. 부부는 한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희선 씨 뱃속에서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가방 두 개 들고 뱃속 아이, 남편과 한국에 왔어요. 남편은 원래 인천에 살았었는데 시누이가 창원에 있어서 창원에 정착했어요. 한국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들을 낳았어요, 생계가 아주 많이 어려웠어요. 남편은 옷 수선도 하고 세탁소도 했어요. 겨우 사파동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살게 되었죠."절박했던 한국말희선 씨의 휴대폰에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한국말이 서툴러 곤란한 상황을 겪는 베트남 이주민과 노동자들이 희선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다. 희선 씨는 한국말을 잘 한다. 10년 넘게 한국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그녀는 스스로 치열하게 한국말을 공부했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와 사전이 그녀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다."한국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한국말 한마디도 못 하니까 생활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도 나처럼 한국말을 못 할까봐 걱정도 됐고요. 무작정 한국 드라마 보면서 배우고, 모르는 말은 사전에서 찾으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희선 씨가 다른 사람에 비해 한국어를 빨리 깨친 비결은 누구보다 절박했기 때문이었다.희선 씨는 2008년부터 3년간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에서 일했다. 첫 시작은 통역 봉사 활동이었다."처음에는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베트남 사람과 한국 사람 중간에서 통역을 했죠. 임금체불 당하거나 체류 문제가 생긴 외국인들, 결혼을 해서 한국에 온 이주민 여성들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면 중간에서 통역할 사람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통역 봉사를 하다가 센터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죠."희선 씨는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에서 근무할 때 법정 통역을 했다. 지금은 상근직으로 일하지 않고 가게를 운영하지만 법정에서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지금도 통역을 맡아한다고 했다.법정 통역은 외국인이 피고나 원고 등으로 법정에 섰을 경우 외국인의 말을 통역해 재판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법정에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판 전후에 필요한 통역도 해야 한다. 외국어에 능통한 한국인이 하기도 하지만 한국어를 잘 하는 외국인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법률용어가 오가고 작은 뉘앙스 차이나 단어 선택이 판결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한국어를 잘 한다고 해도 무게가 만만치는 않을 테다. 이 일을 희선 씨는 어떤 마음으로 해내고 있을까."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법률용어도 계속 공부했죠. 같이 근무하던 선배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전 아직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거든요. 진정서를 어떻게 내는지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처음부터 소장님, 선배님들이 가르쳐줬죠. 그분들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어요. 힘들지만 기억에 남는 일도 많고 그래요."이주민의 눈으로 본 한국한국에 온 지 12년. 베트남을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열세 살 소년이 되었고 불편함 없이 할 수 있게 된 한국말만큼 그녀는 한국이 익숙해졌다. 희선 씨는 이주민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보는 한국인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마냥 웃는 표정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 경계심이 아쉽기도 하다. 경계심은 결국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이주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 또한 그것이라고 했다."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문화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예요. 그렇다고 한국 문화에 천천히 적응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문화의 차이가 스트레스를 주고 자신감을 떨어지게 만들죠. 베트남은 소수민족이 많고 여러 문화가 함께 있어요. 한국은 단일민족이고요. 그런 부분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분명 있죠."하지만 10년 넘게 한국에서 지내오면서 분명 변화의 기운이 돌고 있다고 그녀는 느낀다. 그리고 희선 씨 역시 한국인과 소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제가 다문화축제 맘프(MAMF)에 매번 참가했거든요.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교감하는 축제잖아요. 처음에는 축제에서 외국 음식을 만들면 한국인들이 먹어보려고 한다거나 하는 그런 반응이 없었어요. 근데 작년에는 외국 음식에 도전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또 한국 사람들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나 익숙하지 않고 거부감 드는 음식을 보면 표정에 티를 많이 냈어요. 그런데 작년에는 좀 분위기가 달랐어요. 특히 30대 정도 젊은 분들이요. 이렇게 축제 열고 하는 게 영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보람이 있었어요."고희선 씨가 운영하는 쌀국수 음식점(왼쪽)과 남편이 운영하는 가게(오른쪽).베트남 그대로의 맛 내는 쌀국숫집희선 씨는 쌀국숫집을 하기 전에 노래주점을 운영했었다. 베트남 노래 반주가 나오는 노래방 기계를 베트남에서 구해왔다. 고향 노래를 마음 놓고 부를 공간이 없었던 베트남 사람들은 반가워하며 앞다투어 희선 씨네 노래주점을 찾았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 돼서 기뻤던 것도 잠시, 희선 씨는 1년 만에 노래주점 문을 닫았다."돈을 쉽게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주점을 연 건 아니었는데 그때 '아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구나'라고 알게 됐죠. 처음에는 돈이 모이니까 좋았어요. 근데 갈수록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노래 부르고 술 마시는 곳이니까 늘 시끄러웠고 스트레스도 받았죠. 또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해야 했고요. 그래서 노래주점 문은 닫았어요."지금은 남편이 외국 식재료를 파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그 바로 옆에서 희선 씨는 쌀국숫집을 운영한다. 희선 씨는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가게는 아니라고 했다. 이미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한국식 쌀국수를 파는 곳이 많기에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가게를 열었다고…. 쌀국수 맛도 고향에서 먹던 그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직장에 다니면 8시간 직장에 있어야 하니까 아이를 키우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가게를 하기로 했어요.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먹을 수 있고 저도 먹고 싶을 때마다 베트남 음식을 먹을 수 있잖아요. 대박을 꿈꾸면서 연 가게도 아니고요. 손님은 베트남 사람 반, 다른 나라 사람 반이에요. 한국인들도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한국인 분들에게는 도전해보는(웃음) 그런 맛이죠. 제 나름대로는 잘 운영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희선 씨는 작년에 둘째를 낳았다. 예쁜 늦둥이 딸은 이제 24개월이 되었다. 희선 씨의 친정 부모님도 7년 전 한국에 왔다."부모님은 동생들이 집에서 멀리 직장을 잡아서 혼자 계시고 저는 여기서 아이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같이 살고 있어요. 저희 부모님이 저희보다 한국 생활 적응하기 힘드셨을 거예요. 앞으로 아들, 딸 공부시키고 부족한 거 없이 키워야죠."희선 씨는 귀화했지만 자신은 베트남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고 한국 사람처럼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테두리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다양성을 드러내며 살 권리가 있다. 희선 씨가 법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주민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걱정과 달리 이미 서로 섞이고 있는지 모른다. 김치를 잘 먹는 외국인이 있듯. 더 향내 짙은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있듯.
16.04.01.지난 2011년 7월부터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을 이끄는 최정은(47) 관장. 미술관 운영 10년 중 절반가량을 함께 하고 있다. 그에게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10년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물었다.-개관 이후 관람객 변화 폭이 컸던 것 같다. 전시 내용이 그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전시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개관 초기 전시 내용은 일반 대중 눈높이보다는 높았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관람객 수가 줄었다. 처음 미술관 기반을 다지려면 전문성이 필요했을 것이라 본다. 그래서 취임 후 일반대중을 끌어들이는 사업을 많이 했다. 교육 체험사업, 이벤트를 늘리고, '컨템포러리 한옥', '진례다반사' 등 일반인들이 관심을 둘 만한 전시를 많이 했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시·도립 미술관은 관람객 수치로 평가 받는다. 관람객 수치를 늘리려고 아주 많은 노력을 했다."지난 2011년 7월부터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을 이끄는 최정은 관장.-미술관은 중요한 작품을 수집하는 기능도 크다. 그런데 개관 첫해인 2006년과 이듬해인 2007년 이외에는 소장품 구입 내용이 없다."전체 30억 원가량의 예산 중 소장품 구입 예산이 아예 없다. 제가 미술관에 오기 이전부터 삭감됐다. 소장품 구입 예산을 확보하자면 최소한 5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 있어야 하는데 전시 사업예산도 해마다 줄고 있다. 미술관 창작센터 등을 이용하는 작가들에게 미술관에서 재료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일부 작품을 기증받는 형태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최정은 관장.-개관 당시부터 인근 도예인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관장이 되면서 이웃한 그분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 도자기축제를 할 때 축제 장소가 없다고 해서 미술관 공간을 내어드렸다. 미술관 안에 축제 부스도 설치했다. 올해 말부터는 미술관 내 일부 전시 공간을 협회 등록이 돼 있는 지역 예술인들에게 대관할 예정이다."-미술관이 10년간 가장 주력한 일은 무엇인가?"좋은 전시로, 시민들이 많이 찾게 하는 게 목표였다. 기본적으로 좋은 전시가 있어야 했고, 여기에다 벼룩시장, 어린이미술대회, 팜파티 등 문화이벤트와 체험 거리를 늘렸다. 미술관에 와서 즐기고 갈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인지도를 높이고자 애썼다."-특성화된 미술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더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김해시립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특성화된 '건축 도자'라는 주제, 지역과 밀착한 주제를 가진 게 매우 큰 행운이다. 전국에 시·도립 미술관이 많다. 대부분 비슷한 전시를 한다. 건축 도자라는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운영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도자'라는 주제는 지켜가는 게 지역과 미술관을 위해서 맞다고 생각한다. 도자는 현대 설치미술과 결합하면서 굉장히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현대 미술은 너무 개념적인데, 도자는 수공업으로 작가의 혼이 들어가는 작품이어서 현대미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주변의 많은 미술관이 하는 방식보다는 '건축 도자'라는 주제 주변에 파생 가능한 것들로 확장해나가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이 시립미술관 역할을 일정 부분 하고 있다. '아티스트 인 김해(Artist in Gimhae)', '뉴 페이스 인 김해(New Face in Gimhae)' 전을 통해 지역 예술인을 발굴하고, 평면 회화 중심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최정은 관장.-개관 10년 이후 미술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전문성을 토대로 대중에게 인지도를 얻게 됐다. 타 미술관에서 보면 무슨 이벤트가 이렇게 많으냐고 한다. 미술관이 외진 곳에 있지만 정말 많은 것을 한다. 김해에 문화시설이 많다. 김해가야테마파크가 들어섰고, 레일바이크, 와인터널 등이 있는 김해낙동강레일파크도 개장을 앞두고 있다. 장유 워터파크, CGV 영화관도 있다. 미술관에 오시는 분들이 분산되는 결과가 될 듯하다. 고민을 한 끝에 우리 미술관이 좀 더 깊이 있게 관심 있는 마니아층과 끈끈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판단했다. 미술, 건축 전공자, 관련 교수, 연구기관과 지속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한다. 시민들 문화향유뿐만 아니라 도자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부분을 생각하고 있다. 작가와 함께 도자 타일을 개발해서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 등이다. 산업과 작가를 매개하는 역할을 미술관이 할 것이다. 앞으로는 저희 미술관이 연구소 기능을 해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전시를 하면서, 깊이 있는 전문가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16.03.25.다른 취재로 경남경찰청 성폭력특별수사대 방광주(49·경위) 3팀장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방 팀장은 취재 내용에 응하면서도 '이러이러한 이유로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당부를 했다. 당시에는 그 말뜻이 썩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를 위해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후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성폭력특별수사대는 피해자의 2차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살얼음판 같은 성폭력 수사경남경찰청 성폭력특별수사대 13세 미만 아동, 성인을 포함한 장애인 성폭력 사건을 전담 수사한다. 관련 현황을 보면 2014년 208건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247건 발생했다. 19% 증가한 것으로, 매해 관련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방광주 팀장은 13세 미만 아동, 장애인 성폭력 사건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가해자의 95%는 친족입니다. 그중에서도 이혼 등 아내 없는 아버지가 대부분입니다.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가장 접근하기 쉽고 약한 대상인 딸에게 나쁜 마음을 먹는 거죠."성폭력특별수사대 3팀장 방광주 경위.최근 법 개정으로 이러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친권자 상실 청구도 함께할 수 있다. 또한 피해 아동이 보호받는 장소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범죄 대가를 치른 아버지가 또다시 자신의 아이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전국 각 지역에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지원센터'가 있다. 도내에는 경남경찰청·경남도·마산의료원·여성가족부가 손을 잡은 경남해바라기센터가 있다. 사건이 일어나면 성폭수사대와 원스톱지원센터가 함께 수사·상담·의료·법률 지원을 유기적으로 진행한다.경찰은 피해 신고 없이 그냥 묻혀 버리는 것 또한 발생 건수와 비교해 40%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피해자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피해자 가족을 설득해서 3개월 만에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또 마음을 바꿔버렸어요. 가해자 주변 사람들의 설득이 들어간 거죠. 그래서 목격자에게 부탁했습니다. 4개월 동안 끈질기게 설득해 진술하겠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됐구나 싶었는데, 피해자 쪽에서 합의서를 제출했어요. 참 쉽지 않죠…."그래도 끈질긴 정성을 쏟아 좋은 결과를 만든 사례도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004년부터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인권 보장에 이바지한 사례를 선정하고 있다. 방 팀장이 이끄는 3팀은 지난해 디딤돌 사례에 뽑혔다."아버지가 6살 딸을 상습적으로 추행한 건이었는데요, 그 오빠가 아버지 말에 길들여져 있었어요. 동생을 아버지 방에 들어가라고 강요까지 하는 상황이었죠. 피해 아동을 보호전문기관으로 신속히 분리했고, 성폭력상담소와 연계해 1대1 집중 상담, 정신 치료를 지원했습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했고요. 아버지는 구속 기소 됐습니다."관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피해자·가해자 분리, 그리고 2차 피해 방지다."피해자 위치가 노출되면 가해자가 결국 합의를 종용하게 됩니다. 다른 걸 아무리 잘하더라도 2차 피해가 일어나면 그건 실패한 겁니다. 그렇다고 피의자 인권도 등한시할 수는 없죠. 한 마디로 살얼음판입니다. 성폭력 수사는 어두운 데 있는 걸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일입니다.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접근할 수밖에 없죠."방 팀장은 장애인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한 사례를 꺼냈다. 이 대목에서 방 팀장 목소리에 화가 담겼다."버스 타는 걸 좋아하는 지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한 버스 기사가 못된 짓을 한 정황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를 분석해 보니 의심스러운 내용이 있었어요. 다른 버스 기사와 나눈 대화였는데요, '오늘 그 애를 봤느냐', '나는 오늘 어느 노선이니까 오늘은 네가 그 애를…' 같은 내용이 있었어요. 다른 버스 기사 두 명도 있었던 겁니다."성폭력특별수사대 3팀장 방광주 경위.꿈 이루고 산 지 어느덧 26년사천시 용현면이 고향인 방광주 팀장은 어릴 때부터 막연히 경찰관 혹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요즘 동창회 나가면 친구들이 '너는 학창시절 놀 것 다 놀면서 꿈도 이뤘네'라고 합니다. 공부보다는 취미생활 등 하고 싶은 건 다 했으니까요. 특히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갑자기 마음이 끌리면 녹음기 하나 들고 열차 타고 무작정 갑니다. 그러다 돈 떨어져서 걸어 걸어 돌아오기도 하고 그랬죠."스무 살 이후에도 자유로운 생활은 이어졌다. 물론 변화 계기가 있었다."매형이 공무원 생활을 하다 감정평가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요, 자신이 공부하던 서울로 데리고 갔어요. 제 모습이 답답해서 뭔가 깨우쳐 주려 한 거죠. 매형이 반지하 쪽방촌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모습, 신림동 그 높은 언덕길을 손수레 끌고 가는 사람…. 이런 세상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경찰 시험 준비를 마음속 가까이 둔 채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묘한 인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대장이 경찰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 팀장은 옆에서 시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고, 전역 3~4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했다. 제대 후 1년 가까이 더 준비해 한 번에 시험에 합격했다."경찰에 발 들일 수 있었던 건 제 인생의 멘토인 매형, 그리고 중대장님 덕이죠. 그런데 막상 중대장님은 경찰시험에 합격하지 못 했어요. 지금 공인중개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연락 주고받는데 '경찰 때려치우고 나랑 공인중개사를 같이하자'는 농담을 던지더군요."1990년 23살 나이에 순경이 된 방 팀장은 옛 삼천포경찰서 관할 파출소를 시작으로 형사·수사·조사·경제팀 등을 두루 거쳤다.성폭력특별수사대 3팀장 방광주 경위."굿을 강요하는 종교단체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사건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 교리에 굿을 지낸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굿을 하지 않으면 가족이 병을 얻는다'는 식으로 이용했다는 거죠. 여기에 초점을 맞춰 수사했는데요, 나중에 대법원에서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전에 없던 판례가 하나 만들어진 셈이죠."업무에는 저마다 일장·일단이 있다. 형사계는 몸을, 경제 관련 수사는 머리를 움직여야 한다."형사들은 사기·열기·끈기로 삽니다. 예전에는 수첩 들고 모두 적어가면서 지도 보며 물어물어 집 찾아다니고 했잖아요. 그렇게 발로 뛰다 범인 잡으면 기분 좋아서 소주 한잔 하고, 그 맛에 일하는 거죠. 수사할 때 청결하면 잠이 쏟아지기에 일부러 안 씻고, 수염도 안 깎고 그러죠. 경제팀은 사기범들과 싸워야 하기에 마인드콘트롤을 잘해야 합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때는 정말 화딱지가 안 날 수 없죠. 그럼에도 극복하고 범죄 사실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 업무하는 사람들은 전부 원형탈모에 시달릴 겁니다."1년 전부터 지금 일을 맡은 방 팀장은 이제 늘어나는 흰머리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경찰관 사윗감 대찬성이죠"방광주 팀장은 사천에서 파출소 근무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당시 사회복지시설에 실습을 나갔다. 버스도 저녁 일찍 끊기는 외진 곳이었다. 방 팀장은 이때 보호 순찰을 명목으로 아내에게 접근(?),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하루 3갑씩 피우던 담배도 "계속 피우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아내 한마디에 바로 끊었다.성폭력특별수사대 3팀.그런데 첫아이 출산 때는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애 나올 때 병원에 들렀다가 이후 3개월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 못 했습니다. 파출소 총기 분실 사건으로 전국이 비상사태였거든요. 한날은 아내가 전화해서는 '내일모레 100일'이라는 겁니다. '뭐가 100일이냐'고 되물으니, 아이 '백일잔치'라는 겁니다. 가까스로 첫애 100일 때는 집에 들어갈 수 있었죠. 이후에도 이웃 주민들로부터 '이혼한 것 아니냐'는 오해도 종종 받았어요. 하도 집에 얼굴을 안 비추니 그럴 만도 하죠."방 팀장은 현재 20살, 15살 딸을 두고 있다. 자녀도 경찰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켰다. 둘 다 태권도 단증이 있다."아이 때는 경찰관이 되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손사래 칩니다. 제가 다쳐서 두 달간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더더욱 그러네요. 나중에 경찰관 사윗감을 데려오면 대찬성이죠. 저는 경찰관이 좋습니다. 이 작은 권력을 남용하면 일탈이지만, 사회 약자들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쓸 수 있잖아요. 얼마나 멋집니까."방 팀장은 15년 전 주경야독으로 진주산업대를 졸업했다. 전공이 지금 모습과는 좀 뜬금없어 보이는 임산공학이다."정년까지 10년 정도 남았는데요, 학교 전공인 집 짓고 나무 키우는 것에 대한 미련이 좀 있습니다. 전문으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2 인생 목표를 그쪽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퇴직하고 나면 아내와 캠핑카를 사서 전국을 여행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습니다."성폭력특별수사대 3팀장 방광주 경위.
16.03.17.창원을 기반으로 한 부동산 앱(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나와 눈길을 끈다. 창원지역 부동산 서비스 앱 '방구'다. 요즘 직방, 다방 등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쓴 부동산 앱이 많이 알려졌지만, 이들 앱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수도권 중심으로 짜인 게 사실이다.'방구'는 경남 부동산 시장을 주도해온 창원지역 아파트와 원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지역 기반 부동산 앱 '방구'를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창업한 지 2년 정도 된 '스타트업 브릿지'다.'스타트업 브릿지'가 앱 개발 전 시도한 작업이 있다. 현재 회원 수만 3만 명이 넘는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인 '창원 부동산 이야기'다. 이 카페에는 창원지역 부동산에 관한 세세한 정보가 올라오고 있다. 이처럼 부동산 콘텐츠를 쌓으며 커뮤니티 개념으로 개설한 카페가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부동산 서비스 앱 개발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마케팅 등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고 한다.독특한 이름인 '방구'는 아이디어 회의 도중 불쑥 튀어나왔다. CEO(최고경영자) 정우철(30) 씨는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다 국내로 와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두려움보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고 한다.정우철 대표가 '방구' 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스타트업 브릿지'는 생활정보 신문인 <교차로> 사내 벤처기업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독립한 상태다. 이 덕분에 창원 교차로 부동산 정보와 영업 네트워크를 연계해 창원지역 공인중개사 사무소 1800곳 대부분과도 연결돼 있다고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잇는 마케팅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영업망도 확대해나갈 예정이다.사실 IT 관련 일을 하기에 경남은 기반이 약한 곳이다. '스타트업 브릿지'도 앱 개발자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 대표와 이곳 COO(최고운영책임자) 김정현 씨는 "IT 관련 일은 지역을 넘어 전국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고, 창원보다 수도권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리했다. 하지만 벤처로 출발해 차근차근 전국으로 뻗어나가기를 기대했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창원은 IT와 소프트웨어 업체가 힘든 도시다. 하지만 교차로 홈페이지를 만든 회사인 아이크로스도 창원에 있고, 부동산 정보로 특화해 이제 방문자가 많은 상황이다. 부동산 앱 시장 역시 전국적으로 사업 도모가 가능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방구'에서는 원룸 가격 정보와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아파트 매물과 단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담당 공인중개사에게 전화할 수 있게 돼 있다. 통화량은 광고 효과로 보고 공인중개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스타트업 브릿지'는 아파트 물건을 볼 수 있는 부분을 장점으로 삼고 있다. 아파트는 부동산 시장에서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창원도 아파트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돌아가는 실정이다. '방구'가 성공할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또 앞으로 국내 부동산 임대 시장도 커져 부동산 서비스 앱 이용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정 대표는 "사용자 중심으로 개발이 잘된 외국 서비스들을 벤치마킹했다. 트룰리아(미국 부동산 정보 업체), 에어비앤비(전 세계 숙박공유 서비스) 등에서 UI(User Interface·사용자가 편한 설계 또는 화면 구성)를 참고했다"면서 "빅데이터를 토대로 시세, 가격 전망, 학군 등 종합적인 부동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방구' 앱을 개발한 정우철(왼쪽) 대표와 김정현 기술이사.'방구'는 공인중개사 1명당 20건까지 물건을 게시하는 것이 무료다. 이를 넘거나 상위에 노출되는 물건에는 별도 수수료를 매기고 있다. 20건으로 광고 제한을 둔 것은 진짜 매물을 유도하고 허위 매물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 공식 출시됐는데, 현재 6000건 이상 물건이 등록돼 있다. 안드로이드 앱은 출시했지만, 애플 iOS 앱을 내놓는 것은 숙제다. 이르면 4월 중에 나올 듯하다.'방구'는 이달부터 오는 5월 말까지 '그린 방구 서비스' 프로모션도 진행 중이다. 교차로 부동산 누리집을 보면, 가맹점으로 등록한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게시하는 매물 중에는 신뢰할 수 있다고 인정받은 이른바 '그린매물'이 있다. 이 같은 '그린매물'을 '방구' 앱으로 무료로 노출해주는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다.
16.03.10.오랫동안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손마디가 굵고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의 농부'를 떠올렸다. 고성군 영오면에서 하우스 부추농사를 짓는 송창호(52) 씨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20년 농사지은 50대 농부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의 외모였다. "진짜 직접 농사짓습니꺼?"◇남들 보기에 1년 중 절반은 쉬는 부추농사 = "다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딸아이가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데 학부모 모임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직업이 뭐냐고 하기에 농사짓는다고 했죠.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믿더라고요. 그래서 '모 기관'에 근무한다고 했더니 그 말은 믿더라고요. 하하."송 씨의 비닐하우스에 들어섰다. 스프링클러를 통해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는 부추가 참 싱싱하다. 초록의 싱그런 부추 들판이 펼쳐진다. 그 길이만도 족히 100m는 돼 보인다."한 달에 한 번 수확합니다. 한 차례 부추를 베어내고 30일 정도 지나면 다시 자라죠.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됩니다. 그렇게 여섯 번 정도 수확합니다."송창호 씨.1년 중 절반만 부추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다. 부추농사 외에 또 무얼 심는지 물었다. 송 씨의 답은 의외다. "놀아야죠. 1년 중 절반을 힘들게 농사지었는데 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설마 그렇겠냐 싶어 송 씨를 쳐다봤다. "맞습니다. 정말 부추농사만 짓습니다. 수확을 끝낸 부추밭은 11월이 될 때까지 관리만 하고 그대로 둡니다. 11월이 되면 웃자란 부추를 베어내고 새로 기르게 되죠. 한 번 모종을 옮겨 심으면 3년 동안 이 시스템으로 가게 됩니다."송 씨는 '논다'라는 표현이 외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라고 했다. 그들 눈엔 부추를 방치하듯 내버려두고 있으니 노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송 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쉬운 농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시설하우스보다 수익도 낫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부추농사를 많이 짓지 않을까?"보기보다 부추 농사가 까다롭습니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죠. 특히 겨울철 찬바람만 한 번 쐬면 부추 잎이 말라버립니다. 또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하루 만에 하우스 전체로 퍼져버리죠. 보기와 달리 나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작목입니다."한 해 인근에서 딸기를 재배하던 사람들이 송 씨의 성공 모습에 부추를 심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추농사를 지어보니 쉽지 않아 모두 실패하고 다시 딸기를 재배한단다. 그만큼 환경관리가 어려운 작목이라고 했다.고성군 영오면서 부추를 재배하는 송창호 씨.◇끈질기게 매달려 터득한 기술 마침내 '상품화' = 통영 사량도가 고향인 송 씨는 섬에 고등학교가 없어 통영으로 나왔다. 성인이 돼 군 제대 이후 부산에 살면서 결혼도 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실내장식 일을 했단다. 하지만 사업도 잘 안 됐고, IMF 외환위기 사태를 맞으면서 더 어려워졌다. 결국 1998년 8월 고성군 영오면 지금의 마을로 들어오게 됐단다."워낙 부산 생활이 어려워 고민하고 있는데 지인의 소개로 이 마을로 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죠. 시골 공동체에 낯선 이방인이 들어왔으니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겠지요. 다시 지인에게 부탁해 동네 사람들을 사귀게 됐고, 그분들을 따라다니면서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분들처럼 처음엔 딸기와 호박을 심었습니다."10년 가까이 그렇게 딸기와 호박 농사를 지어 나름 수익을 냈다. 하지만 송 씨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부추'였다."김해 대동에서 노지에 부추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알던 사람이었죠. 그분에게서 부추 농사가 해 볼만한 일이라는 걸 익히 들었습니다. 연료비 적게 들고, 한 번 심으면 3년간 이어 지을 수 있다고 해 견학을 가곤 했습니다."부추농사를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하다 진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최고영농자과정에 들어갔다. 원예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부추농사를 지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12명이 모였다."정보를 공유하면서 하우스 반은 딸기를 심고 반은 부추를 심었습니다. 당연히 첫해는 실패했죠. 기술이 없다 보니 어느 정도 자라면 끝이 말라버려 상품성이 없었습니다. 재배기술을 배우고자 울산 포항 등지로 1년에 열 번 넘게 다녔습니다. 그곳 농민들에게 밥을 사 줘 가며 묻기도 하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전화를 해 기술을 익혔죠. 그렇게 3년 정도 매달리니 시장에 내다 팔 정도의 부추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됐다' 싶어 딸기 대신 모든 하우스에 부추를 심었습니다. 그게 10년 전쯤 일이죠."◇섣부른 귀농귀촌, 행복한 미래 보장 못 해 = 그렇게 남들 보기에 '놀면서 농사짓는' 송 씨의 소득은 어떨까? 그는 "연간 매출이 3억∼4억 원정도 될 건데 그중 경비가 40%가량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 인건비에 끊임없이 재투자를 해야 해 나머지가 모두 순수익이라고 하기가 뭣합니다. 분명히 딸기농사 때보다는 낫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송 씨 역시 대부분 귀농인이 그렇듯 잘못된 정보에 현혹돼 예비 귀농귀촌인들이 잘못된 결정을 할까 봐 말을 아낀다."귀농하려는 사람, 특히 시설하우스를 하려면 2~3년 전부터 견학을 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면 시작해야 합니다. 뚜렷한 계획 없이 시골에 들어가면 대부분 실패하죠. 그리고 귀농을 결심했으면 귀농지 특산물을 파악할 필요가 있고, 배워야 합니다. 만약 어떤 작목을 정해 그것을 재배하고 싶다면 그 작물을 생산하는 곳에 가서 반드시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역시 다른 귀농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다.아내 정유정(51) 씨와 약 90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부추농사를 짓는다는 송 씨는 올해 2000평 정도 재배면적을 늘릴 계획이다. 고성에 부추농사를 전파해 현재 17명이 부추작목반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송 씨가 너스레를 떤다."지금까지 군수 표창과 농촌진흥청장 표창은 받았는데 아직 도지사 표창은 못 받았습니다. 이만한 노력이면 선도영농인으로 도지사 표창 감이 안 될까요?" 송 씨의 표창 소식을 기대해 본다.
16.03.07.